가족 여행을 가면 잘 모르는 어른들도 먼저 말을 걸어오곤 했다. 연년생이라 다들 고만고만한 키에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던 우리 삼남매가 눈에 띄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우리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엄마 닮았어, 아빠 닮았어?"라고 묻기도 하였다. 장난기 어린 말투로 보아 정말 궁금한 것 같진 않았는데, 비슷한 질문을 여러 차례 받고선 나 역시도 그 답이 알고 싶어졌다. "우리 누구 닮았어?" 엄마에게 물으니, 옆에 같이 있던 언니, 오빠에게는 각각 아빠와 엄마를 닮았다고 시원하게 답을 해놓고, 나를 두고는 간단치가 않다는 듯 오래 고민했다. 고심 끝에 엄마가 내놓은 대답은 "반 반"이었다. 엄마 반, 아빠 반.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결론을 두고 나는 개운치가 않았다. 하나는 엄마가 곧바로 답하지 못한 이유가 그간 언니나 오빠만큼 나를 관심 있게 바라보지 않아서일 거라는 의심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질투가 많은 아빠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엄마가 진실과 상관없이 다분히 의식적으로 솔로몬 같은 답을 내놓은 것 같다는 추측 때문이었다. 찜찜함은 남았지만 어쨌건 나는 나만 양쪽 모두에 속한다는 사실이 조금 뿌듯했고, 나로 인해 우리집의 평화가 깨지지 않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결국 나중 가서는 다시 엄마의 말을 곱씹으며 서운해했는데, 자기랑 닮은 자식을 더 사랑하기 마련일 나의 부와 모에게 나는 언제나 잘해봐야 2순위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였다.
엄마를 절반만 닮은 것치고는 자라는 내내 엄마로부터 '넌 날 닮았어'라는 말을 빈번하게 들었다. 엄마는 그 말을 주로 내가 뭘 못할 때 했다. "넌 날 닮아서 그림을 못 그려." "넌 날 닮아서 창의력이 없어." 그런 말을 할 때에 엄마는 무덤덤했고, 자신은 그저 건조하게 사실을 말할 뿐이라는 태도였다. 내가 봐도 나를 깎아내리거나 내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 같은 건 없어 보여서, 나는 이것저것을 못 하는 사람이 된 걸 속상해하기보다는 엄마를 닮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림을 못 그리는 것, 창의력이 없는 것 등을 받아들였다. 뭘 잘한다는 말을 필요 이상으로 아끼던 엄마는 내가 글쓰기만큼은 자신을 닮아 곧잘 한다고 말해주었다. 엄마는 칭찬에 박한 사람이었는데, 나이 터울이 한 살씩밖에 나지 않아 이미 충분히 경쟁적인 삼남매 중 한 사람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인정욕구가 하늘을 찌르던 나는 미칠 노릇이었다. 100점 맞은 시험지나 상장을 들고 가도 "잘했네"라는 말 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엄마는 나의 글에 있어서만큼은 주변 사람들에게 은근히 자랑할 정도로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중등 국어 교사였던 엄마는 아이들의 글을 엮어 문집을 만드는 것을 이미 수년간 해오고 있었는데, 어쩌다 한 번씩 길게 가족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우리에게도 방학 숙제 겸 여행기를 쓰게 한 뒤에 그걸 묶어 책처럼 만들어 지인에게도 한 부씩 주었다. 그걸 읽은 어른들이 특히 나의 글을 칭찬할 때면 평소 으스대는 법이 없는 엄마도 공연히 겸손의 말을 하거나 겸연쩍어하는 일 없이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서 동의한다는 듯 그 말을 거들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엄마는 나에게 자기 자신을 포개어 보면서 내가 주변 정리를 못 하는 것도, 일단 뭐든 미루고 보는 것도 다 엄마를 닮아서라고 했다. 나는 단순히 납득하는 걸 넘어 이젠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엄마와의 공통점을 찾았다. 그러는 동안 아빠와의 닮은 점 같은 건 의식하지 않았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 아빠는 어렵고 먼 사람이었다. 어릴 때 마당에서 비행기 태우기 놀이를 하며 곧잘 놀아주던 아빠는 우리가 어린이티를 벗고 어른의 외양에 가까워지자 데면데면하게 굴며 거리를 두었다. 다른 것보다도 아빠의 처지가 스스로도 심란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빠에겐 변변한 직업이랄 게 없었다.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부모 직업을 적어 오라고 하면 아빠 직업란을 비워둔 채로 엄마에게 가져가 뭐라고 적으면 좋을지 물었다. 그럼 엄마는 약간 고민하다가 '농부'라고 쓰라고 했다. 그럼 나는 '농부'라고 적었다. 집에 논과 밭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농부가 직업이라고 할 만큼 규모가 큰 것은 아니었다. 그걸로 돈을 벌 수는 없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빠는 어떤 결심이 섰는지 시의원 선거에 나갔다. 언젠가 흘려듣기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직 병상에 누워있을 때 엄마를 따로 불러 아빠가 정치인의 꿈을 꺾지 않거든 한 번쯤은 나가게 두어라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빠에겐 꽤 오래된 꿈이었다. 당시 나는 가족 중 누군가가 선거에 나간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몰랐는데, 그 변변찮은 시골 동네 몇 곳을 지역구로 하는 시의원, 그것에 도전해 본 대가는 아빠의 예상보다도 훨씬 혹독했던 것 같다. 아빠는 집안의 있는 돈 없는 돈, 심지어 내 용돈까지 탈탈 털어다 쓴 뒤 낙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살던 집, 아빠와 아빠의 가족들이 대대로 살던 고향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우리 가족은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교육 문제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아빠는 가족 곁에 머물며 상처를 회복하는 대신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떠날 때까지 엄마 외엔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나의 입장에선 아빠가 돌연 증발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빠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하기 위해 사라졌다. 나머지는 고스란히 가족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빚더미에 앉은 엄마는 매일매일 성실히 출근하면서, 퇴근해서는 우리를 돌보면서, 가끔은 앞뒤 설명 없이 그냥 사라져 버린 아빠를 대신해 아빠의 형제자매를 직접 찾아가 가족의 도리를 다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나는 소리 없이 분노를 꽉꽉 눌러 담으며 사춘기를 보냈다. 가끔은 엄마의 아이디로 접속해 아빠가 먼 나라에서 엄마에게 보내온 이메일을 몰래 훔쳐 읽었다. 그리고 엄마는 왜 아빠와 이혼하지 않는지, 어른들의 사정은 왜 이리도 복잡한 것인지 의아해했다.
아빠는 떠날 때만큼이나 예고 없이 훌렁 돌아왔다. 현관문에 선 아빠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던 것, 아빠를 맞이하면서도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몰라 애매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인사를 건네던 것이 생각난다. 캐리어 가득 담겨있던 아빠의 선물들도. 돌아온 아빠는 아주 작아졌다. 부피를 크게 차지하지 않을 만큼 쪼그라들어서 전처럼 기세 좋게 큰소리치는 일이 없었다. 여전히 돈은 벌지 않았다. 직장을 구하는 대신 다른 일에 매진했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뽑히거나 각종 이벤트에 응모해 당첨된 경품들이 집에 쌓였다. 아빠 나름대로 집에 무언가를 보태고자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지인의 소개로 다른 회사에 취직해 보기도 하고, 택시 운전을 시작해 보기도 했지만 무슨 일이든 아주 오래 하지는 못했다. 아빠. 도망친 아빠. 생활력이 없는, 무책임한 아빠. 아빠의 그런 면면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내가 대학에 가고 몇 해 뒤쯤, 집안 사정이 많이 나아져 엄마와 아빠는 잃었던 시골집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 둘은 안정을 얻어가고 있었다. 도시에서 택시 기사를 하는 동안 피로와 짜증이 짙게 묻어나던 아빠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빠는 집 가꾸기에 몰두했다. 전 주인이 무심하게 베어낸 나이 든 나무들을 아까워하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나무를 심었다. 마당은 금방 각종 나무와 풀, 꽃으로 가득 찼다. 땅에 무얼 심고 기르는 건 아빠가 사는 내내 해온 일이었다. 따로 공부한 적 없지만 일찌감치 어른들 어깨너머로 배운 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한 일. 집이 얼추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오고 나자, 이제는 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에 가서 무엇이든 배우기 시작했다. 캘리그라피, 서예, 도예, 베이킹……. 한 달에 한 번쯤 고향에 가면 아빠가 만들어낸 것들이 집안에 즐비하였다. 미감도, 손재주도 좋아서인지 무얼 하든 평균 이상의 결과물이 나왔다. 아빠는 이 프로그램에서 저 프로그램으로 옮겨 다니며 공백 없이 활동을 지속했다. 활동보다도 활동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감각을 위해 시간의 빈틈을 메꾸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불안을 잊으려고. 여전히 돈이 되지 않는 일들이었지만 전처럼 아빠가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 역시도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아빠와 마찬가지로 변변찮은 직업 없이 나이를 먹었다. 어른이 된 뒤 이상하게도 내 삶의 경로는 자꾸만 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대학 생활까지는 어찌저찌 성실히 했지만, 졸업 후 어떻게 먹고 살지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이 내 머릿속엔 없었다. 대체 나의 어떤 재능을 살려서 돈을 벌 수 있는 건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때그때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조각난 경력들을 간신히 이어 붙여 살아가던 나는 20대 후반에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도서관 계약직을 마지막으로 구직 활동의 의욕을 잃고, 깊은 무기력에 빠졌다. 마음을 돌봐야 할 때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돈을 벌고 있지 않은 내가 스스로도 못 견디게 못마땅했다. 나 자신을 한심해하면서 속으로 막 다그치고 나면 전보다 더 깊은 무기력이 찾아왔다. 내 힘으론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 같았다.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엄마에게 느끼는 죄책감도 한몫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서도 제 앞가림 하나 못하고 엄마에게 도움은 못 줄 망정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고, 또 자꾸 아빠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문제였다. 내가 아빠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니.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라니. 그렇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심리 상담을 받았고, 요가를 배웠고, 또래 청년 커뮤니티에 속했고,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매일 밥은 해 먹었고, 저녁엔 산책했다. 여하간 돈 되는 것 빼고는 다 했다.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서도 나는 나를 망가뜨리지 않았고, 오히려 몸의 건강 같은 건 더 신경 쓰면서 살았다. 당시 일기에도 적었던 것처럼 나는 나를 파괴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일 보 전진했다 이 보 후진하기도 하며 결국엔 무기력의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엄청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돈을 벌지 않는 사람은 너무도 손쉽게, 그가 어떤 영혼을 가졌든 간에, 보잘것없고 초라한 존재로 전락하는 세상에서 때로는 그런 나를 견디며 사는 게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힘겹게 느껴진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아빠를 떠올렸다. 아빠도 비슷한 시간을 지나온 것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그 시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어떤 일은 저절로 이해가 된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아빠가 끔찍이도 미워 사소하게 닮은 점도 싸그리 외면하던 나는 결국 아빠의 삶씩이나 되는 걸 닮아 버렸다. 아빠를 머리로는 도무지 좋아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사랑하는 마음을 저버릴 수도 없어서, 그 삶을 비슷하게 살아보는 것으로 아빠라는 사람을 더듬어보고 있는 건 아닐까. 딸이 아빠를 닮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나는 삼십몇 살이 되어서야 내가 아빠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