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접시를 들고 책상 앞으로 다시 돌아온다. 프라이팬에 빵을 굽는 동안 머릿속 안개도 조금 가셨다. 조금 전까지 도래한 AI 시대를 두고 유튜브에서 온갖 사람이 떠드는 온갖 말들에 정신이 아득해지던 참이었다. 지금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십시오. 앞으로 3년간은 미친 듯이 돈 모으십시오. 당장 이것 하십시오. 저것도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3년 뒤 내 자리는 없습니다. 사실 지금도 늦었습니다. 대비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답니다? 불안감이 엄습한다. 직장과 직업 없이 지낸 게 꽉 채워 2년이다. 이미 궤도 밖에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앞으로 더한 변두리로, 끝 모를 저편으로 밀려나고 마는 것일까?
새해를 앞두고 나의 마음은 분명 가뿐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생각했고, 앞으로의 일 년도 비슷하거나 어쩌면 그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지지난해보다 지난해가 더 살 만했듯이 지난해보단 이번 해가 더 수월할 것 같았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퇴사하고 보낸 지난 2년은 긴 도움닫기고 이젠 제대로 뛰어볼 일만 남았다는. 머리로 구상만 하던 걸 몸으로 행할 힘이 지금의 나에겐 있다는. 그렇게 1월이 되었고,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다.
12월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는데 어쩐지 이미 몇 개월째 하고 있는 치약 공장 아르바이트가 부쩍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손목 통증은 여전했고, 언젠가부터는 손가락을 주무르며 잠에서 깨게 되고는 하였다. 손 마디마디가 아픈 바람에 손을 쫙 펴는 단순한 동작에서조차 불편함이 느껴졌다. 취업 대신 단기 알바와 같은 임시의 상태에 머무는 건 생계를 위한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분리하고 싶어서인데, 알바로 촉발된 통증이 보란 듯이 일상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손이 아플 때마다 나는 나의 몸이 낡고 또 닳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고, 알바의 잔여물이 일상 곳곳에 침투해 있는 것 같은 묘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몸과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아 연말의 가뿐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울적할 때면 침대에 모로 누워 영화를 봤다. 어디에선가 우울할 때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게 실제로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된다는 얘길 들은 적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환기도 되고,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 어떻게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지 보며 나름의 교훈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영화가 기분 전환에 효과가 있는 건 아니어서,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던 어느 날, 예전에 본 <멜랑콜리아>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가 결과적으로 이 영화 때문에 우울이 더 깊어진 일도 있었다.
<멜랑콜리아>는 우울증이란 뜻을 가진 행성 '멜랑콜리아'의 지구 충돌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저스틴은 우울증을 겪는 인물로, 먹고, 씻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무기력증에 시달리는데, '멜랑콜리아'가 마치 두 번째 달처럼 하늘에 떠 있는 모습을 보고 나서부터, 그러니까 종말이 코앞으로 왔다는 것을 예감하고 나서부터 오히려 평정심을 되찾는다. 겁에 질린 언니 클레어나 무책임한 낙관으로 도망가는 형부 존과는 달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덤덤히 받아들이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그 자신도 심각한 우울증을 겪은 적 있는 라스 본 트리에 감독은 상담가로부터 '우울증 환자가 재앙적인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보다 더 침착하다'라는 얘길 들은 뒤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미 내부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우울증 환자는 외부 사건으로는 쉽게 동요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어쨌든 병리적 우울증을 몇 해 전 통과한 나는 종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나는 나의 작은 종말보다 세상의 거대한 종말을 더 자주 떠올리고, 더 많이 걱정한다. 전에는 나의 끝이 곧 세상의 끝이었다면, 이젠 세상의 끝이 곧 나의 끝인 것 같다. 나의 의지와 관련 없이 세상이 먼저 셔터를 내려버릴까 봐 무섭다.
요즘 내가 떠올리는 종말의 장면엔 AI가 있다. AI가 세상에 가져올 편리함보다는 야기할 혼란에 온 신경이 쏠린다. AI로 인한 대량 실업, 노동의 종말, 그런 것. 십수 년 전, 노동은 신성하다던 대학 교수님의 말은 그 뒤로도 종종 떠올라 진득하게 노동하지 못하는 나를 스스로 비난할 때 쓰였는데, 그 강의실에 있던 누구도 이렇게 가까운 미래에 노동의 종말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을 거다. (일단 나는 몰랐다.)
그런데, 우울증 환자인 저스틴이 지구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수차례 공백기를 지나오면서 사회적으로 충분히 낙오한 내가 새삼스럽게 AI로 인한 노동의 종말 따위를 이렇게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지도 모른다. <노동의 종말>을 쓴 제러미 리프킨 왈, 결과적으로 사회는 '일하는 소수'와 '배제된 다수'로 갈라질 것이라는데, 이참에 다수에 속해 기꺼운 마음으로 보편적인 배제를 누려보는 것도 방법일지도.
장난처럼 말했지만, 분명한 건 아등바등 일하는 소수가 되려고 기를 쓰고 싶지는 않다는 거다. 내가 직장과 직업이 없는 채로 지금까지 연습해 온 것은 어쩌면 노동 또는 내 쓸모에 가치를 두지 않는 방법 그 자체이고, 이것이 나에겐 생존을 위해 연마해야 할 최선의 기술처럼 느껴진다.